올 봄, 코트를 벗기에는 아직도 겨울의 남은 스산함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 정문 앞에 서서 저는 제 1 기 사이버 외대 입학식 참석을 위해 아내와 함께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한 무리의 인파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고 아내도 내 손을 잡고 차도로 내려가는 동작을 취했으나,
저는 그 자리에 멈췄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영희야,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나는 지금 이렇게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 영희야,
잠깐만... ”. 그리고 저는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이미 젖어있는 눈에서 볼을 타고 한 방울 주르르 흐르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잿빛 겨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34 년 전 겨울, 제가 지금의 바로 이 자리에 왔다가 그냥 돌아갔던,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게 참담했던 내 젊은 날의 어느 한 날,
그 날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때 외대 입학시험에 응시하려 응시 지원서를 구하려고 바로 이 자리에 왔다가
삶의 벽을 만나고 그냥 발길을 돌렸던 아주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응시 원서 한 장 살 돈, 몇 백 원이 없었습니다. 물론 돌아 갈 버스비 단
몇 십 원도 없어 정거장을 등지고 길게 걸어가야만 했던, 너무나도 서러워 입속에는 항상 마른 모래만 가득했었던 것
같은 아주 슬픈 시절의 추억입니다. 그리고 34 년이 흐른 오늘, 이제 정식 입학 허가서를 가슴에 품고 바로 그 자리
그 교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저에게
눈물은 차라리 사치일 뿐, 뉘라서 지금의 저의 감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어느 해 겨울, 서울의 변두리 버스 종점, 김포평야의 한 귀퉁이에 있는 김포공항 활주로
철조망에 올라타서 미지의 외국을 향해 비상하는 비행기의 이륙을 몰래 훔쳐봤던 시골 촌뜨기는 붙잡고 올라 타 있던 철조망에서
내려와 손아귀에 묻어있는 밤색 녹슨 철 조각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저 비행기를 탈 것이다. 매일 탈 것이다. 영어를 잘해서 저 비행기를
탈 것이다 ...
그리고 잠시도 주저함이 없는 냉혹한 현실의 하루하루가 저에게 다가왔고 또 지나갔습니다. 맨 주먹 상경 19 살 시골뜨기에게
오늘은 혹독한 현실이었고 내일은 희망이었지만 슬피 반추해야 할 어제는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잘 인쇄된 표지의 영어교제나
강의록은 꿈속에서나 만났고 어쩌다 내게 굴러온 겉장 찢긴 헌 영어 참고서의 멋진 영어 구문은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해서
저는 그걸 외우고는 종이를 찢어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어 뱉었습니다. 어렵게 청계천 헌 책방에서 산 콘사이스 영한사전은
내 앞서 바뀐 주인이름이 마지막
안표지에 이미 네 명이나 적혀 있었습니다.
삶은 처절했으나 내 젊음은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내 삶과 항상 거리가 있었으나 내 목표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느리지만 멈춤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장대
소낙비 후 패인 도로를 긴급 보수하는 서울시 긴급 도로 보수 트럭에 올라타 일용직으로 삽 들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트럭
위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30 촉 백열등 염색 공장 창고에서도 영어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내 젊음이 파 먹혀
들어가는 것 같은 공장 소음 속에서도 나는 영어를 붙잡고 내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
군대 3 년, 포 벙커에서도, 날밤을 꼬박 세우는 상황실에서도 나는 다 헤진 단어장과 숙어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무전기 안테나 끝을 타고 들려오는 미군방송에 매달려 발음을 익혔습니다. 그러자 눈이 떠지고, 입이 트이고,
귀가 열렸습니다. 군대 3 년 동안 받은 봉급을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어머님께 몽땅 갖다 드린 군 제대
그 날, 그렇게도 냉정하셨던 당신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작은 날개 짓을 하려하는 당신
아들의 비장함을 알아 차리셨을까요? 내 어깨에 따스한 손을 가만히 올려 주시며 돌아가신 어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가, 너는 발가벗겨 눈구덩이에 내놔도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군 제대 후 바로 그 이튿날부터 공사판 자갈 나르는 질통을 지었습니다. 물론 가슴에는 단어장, 주머니에는 숙어장을
품고서 노가다 휴식시간에는 모퉁이 그늘을 찾아 가슴을 열고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당히 무역회사에
응시, 저의 뜻을 펼칠 날개를 달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험은 끝이 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비행기를
탔고, 오 대양을 돌았으며 육대주를 누비었습니다. 즉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배우고 익혔던 영어의 단어와 숙어를 혀 속에서 다시 뱉어내어 저는 영어를 말했습니다. 그렇게도
하고자 했던 영어를 하며, 그렇게도 타고자 했던 비행기를
타게 되었던 것 입니다.
무역을 하며 기술은 서양인, 혼은 한국인 즉, 양기한혼의 철학으로 당당한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사랑하는 조국의 충실한 외화벌이 꾼으로 자처하며 이르길 26 년, 이제는 어느 정도
삶의 안정도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던 어느 날 저는 내 일상의 추진력이 무디어져 감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다시 점검해 보았습니다.
혹시나 저는 내 영혼을 갉아먹는 것 같은 보잘것없는 성취를 베개로 나태에 빠져 있지나 않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내 삶의 목표 한 가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걸 깨달았습니다.
무역을 하는 동안 주 거래처 영국을 수도 없이 왕래하며 저는 영국의 문화, 영국인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국문학에 대해 짙은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사업을 접고 여유가
생기면 꼭 해보고 싶은 일로, 정통 영어를 익혀 영국 문학을 탐구하고, 영국인의 해학을 파헤치며, 어찌해서
영국인은 버킹험 궁 광장에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상징으로 네 개의 문을 만들어 놓고 국가적 행사에
보기에도 황홀한 중세 기마병들이 따각, 따각 말을 몰고 그 문을 통과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들의 정신이
어떻게 생겼길래 전 세계를 지배해 왔는지 꼭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뜻을 세우고, 제가 제 발로 찾아 걸어왔었으나 뜻을 접고 다시 돌아서야만 했었던 참담했던
내 젊은 날의 그 교문을 다시 찾아 , 이렇게 아내의 손을 잡고 못 이루었던 34 년 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입학식장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과 편안한 일상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저에게 있어 도전이 없는 일상은 죽어 쓰러져 땔감이 되어버린 고사목일 뿐, 제가 저를 그렇게 묻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입학식 이후 저의 나날은 새로운 도전,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꾸려 나가는 사업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주중의 근무 시간에서 단 몇 분도 여유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니 책을 끌어당기는 시간은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 뿐, 당연히 TV 와 뉴스는 저와 남이 되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채워지는 고객이나 친구들과의 저녁약속은 4 년 후로 과감하게 미루어졌으며, 저의 관심은 오로지 학과 진도요 교수님
말씀 뿐, 서점을 찾아 관련 책을 사서 읽고, 잃어버린 암기력을 되돌려 보려는 처절한 투쟁의 항해가 전부이었습니다.
늦은 밤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피로에 지쳐 모가지가 옆으로 홱! 돌아가 처박힌 채 하얀 새벽을 맞이한 지가 몇 번이던가요?
보이지 않는 작은 활자체를 읽으려 돋보기로 손을 뻗히다가 커피를 쏟고, 처음 맞는
중간고사에서의 탈락 흉몽을 꾸며 온몸에 식은땀 범벅으로 코피를 쏟고 깨어나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켜던 그 새벽은 이 무모한 도전이 또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래왔듯, 생의 전쟁터에서 말 못하고 쫒기는 짐승이길
거부했습니다.
결심이 약해지고 초심이 흔들리면 저는 기꺼이 나를 지지해 주는 처방을 찾았습니다.
운동화의 끈을 조이고 한강변으로 나아가 마라톤을 했습니다.
이른 신 새벽 하루도 빠짐없이 40 여 리를 단숨에 뛰었습니다.
초심이 흔들리던 어느 날 주말 강의 직전에는 100 여리를 뛰며 자세를 고추 잡았습니다.
한 밤중이라도 공부의 벽을 만나면 나는 운동화를 신고서 허리에 물통 하나 차고 머리에 등산 헤드랜턴을 달고서 한강변을
달렸습니다. 지난 초여름에는 나 자신을 포함, 조금씩 지쳐가는 학우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저의 모든 걸 걸고서
생애 최초 100 Km 장거리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 , 장장 13 시간여를 쉬임없이 뛰면서 제 스스로 선택한 제 1
기 사이버 외대인의 의미를 되새기고 날 다시 강의 모니터 앞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도전은 혹독한 시련과 함께 달콤한 성취감도 줍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로부터
듣는 강의를 통해 배우는 즐거움, 동료 학우들과 나눠 갖는 살가운 우정, 등교하면 세상사 잡일과 간단하게 유리되는
교정의 마력. 저는 느낍니다. 저의 선택은 옳았고, 저는 이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 공부하다 또
지치면 저는 100 Km 초 장거리 마라톤에 다시 도전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저를 포함 , 사이버 외대 제 2 기
후배들에게도 저의
굽힐 줄 모르는 학구열에 대한 진지함을 전달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치면 다시 또 도전, 강철 같은 내 의지를
시험해서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이버 외대생
제 1 기의 전통을 수립해 보겠습니다.
존경하는 학과장님!
저는 학과장님으로부터, 곧 제 2 기 사이버 외대 신입생을 모집할 예정이며, 입학 신청자들이 입학 지원서를 내기 전에
입학 및 입학 후의 학과 활동이나 학습에 관한 전반 문의 사항에 대해 상담해 줄 재학생 지원자를 모집할 예정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학과장님, 외람되오나 제가 그 적임자입니다.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제 삶이, 제 몸뚱이가 바로 그 해답입니다.
34 년 전 바로 저 교문을 들어오기 위해 뜻을 세웠다가 불운에 눈물 훔치며 돌아서야했던, 그렇지만 결단코
좌절하지 않고 기어이 그 뜻을 관철하고야 만 제가 바로 그 해답입니다. 능력은 보잘 것 없으나 매 강의에
단 한 번의 빠짐이 없이 제일 먼저 강의실에 도착, 실내등을 내 손으로 점등하고서 맨 앞에 다소곳이 앉아
강의 노트를 펼치고 있는 바로 그 성실함으로 좌표를 삼아 드리겠습니다. 만의 하나 어느 한 분이, 제가
그랫듯, 바로 저 교문에서 입학을 망설인다면 그는 바로 저를 만나야 할 분이며, 저의 존재는 바로 그 분을
위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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